본 포스팅은 PC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보시면 부자연스러울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오늘은 강화도 용흥궁의 소식을 전해줄 SDudio입니다.
강화도에 도착하면 많은 분이 둘러보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인데요.
강화성당 앞에는 큰 잔디밭과 주차장을 겸비한
‘용흥궁 공원’이라는 곳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업무차 강화도에 가면서
‘용흥궁의 명칭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라는 의문을 시작으로
이번 시간에는 용흥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용흥궁 공원은 우선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05’에 위치한 곳입니다. 동시에 넓은 잔디밭을 가진 용흥궁 공원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공원 뒤로 보이는 높은 한옥 건물이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입니다. 이처럼 용흥궁과 강화성당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데요. 그 때문인지 많은 분이 ‘강화성당공원’이라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용흥궁은 용흥궁 공원에서 강화성당으로 가기 위해 올라가는 언덕길 우측에 있는데요. 많은 분이 강화성당 일부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엄연한 ‘궁(宮)’입니다. 용흥궁(龍興宮)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 (생애 1831 - 1863, 재위 1849 - 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1853년 (철종4)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세우고 용흥궁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유수(留守) 조선의 행정 구역인 유수부의 수장으로 강화도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군사적 요충지가 된 점이 반영되어 1627년 유수부로 승격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특별자치시와 유사합니다.
원래 용흥궁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농사꾼 이원범의 집으로 불렸던 곳인데요. 원래 이원범(철종)은 전계대원군 아들인데요. 실제로는 왕족이었지만 그의 가족들은 왕족 지위를 가지지 못해서 평민의 삶으로 강화도에서 초가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초가집이었지만 이원범이 조선왕조 25대 임금인 조선 철종으로 즉위하게 되고, 신분이 평민에서 왕족으로 격상됨에 따라 이원범의 집으로 불렸던 초가집을 헐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 자리에 기와집의 잠저를 지으면서 용흥궁이라는 한옥을 짓게 되었다고 하네요. 용흥궁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1995년 3월 1일 지정되었습니다.
잠저(潛邸) 나라를 처음 이룩한 임금이나 종실(宗室, 임금의 친족)에서 들어온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또는 그동안에 살던 집. 용잠(龍潛)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용흥궁(龍興宮)은 전설에 따르면 1849년 (철종 즉위년) 철종이 왕이 되던 연도에 ‘봄부터 한줄기 밝은 빛이 철종이 살고 있던 초가집으로 비추어 용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해 6월에 철종을 모셔가기 위한 봉명단 일행이 강화도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야 그 빛이 사라졌다고 해서 ‘용이 일어난 집’. 즉, 용흥궁이라고 불렸다. 오늘날 용흥궁에 있는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하네요.
용흥궁은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이 소박한 분위기를 풍기는데요. 오늘날에는 내전 1동, 외전 1동, 벌전 1동, 잠저구기비각 1동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용흥궁은 사대부의 살림집이 아니라 궁이기 때문에 안채는 내전이라고 부르고, 사랑채는 외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왕이 머무는 외전을 내전 뒤에 두어서 권위와 전망을 고려해서 설계했다고 하네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각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인데요. 기와지붕 구성물의 하나인 처마 도리를 음양오행에 따라 외전을 둥글게 하여 하늘을 상징하고, 내전은 네모나게 하여 땅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보통 조선 시대 집의 구조는 부엌은 좌측에 붙어 있게 마련인데요. 용흥궁의 부엌은 우측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안채 입구가 안채의 좌측에 있다 보니 부엌이 좌측에 있으면 대문에서 바라보이는 부분이 막혀 답답해 보일 뿐만 아니라 부엌에서 필요한 작업공간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일반 민간주택과 비교하면 광이 많은 편이고, 행랑채 왼편에는 안채에서 외부로 출입하는 출입문이 있습니다. 용흥궁 중 외전에 해당하는 사랑채가 바깥주인의 거처이면서 손님을 맞이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인 가옥형 정자에 해당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잠저는 태조의 함흥 본궁(本宮), 개성 경덕궁(敬德宮)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운현궁(雲峴宮)뿐인데요. 특히, 용흥궁은 오늘날 남아있는 잠저 중에서도 섬에 있는 잠저로 다른 지역에 있는 잠저보다 더욱 희소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흥궁의 소유자는 이해승(李海昇)의 후손인데요. 문제는 이해승은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5대손으로 ‘친일 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된 친일인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섬에 있는 유일한 잠저(潛邸), 용흥궁(龍興宮)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사실 이곳이 뭐 하는 곳인지 제대로 설명이 나와 있지 않아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이 ‘강화성당의 일부’라는 오해를 하고 있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심지어 용흥궁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1995년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친일재산 환수 소송으로 인해 제대로 된 홍보가 안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추가로 경인일보에서 보도한 자료에 따르면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정부와 이해승 후손 간 소송전’에서 정부가 패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인 것 같습니다.
이상 강화 용흥궁에서 SDudio였습니다.
감사합니다.
(01)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용흥궁 (龍興宮)’’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022년 2월 14일 열람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2300200000&pageNo=1_1_2_0
(02) ‘용흥궁’ 위키백과
Sadopaul, 2021년 7월 22일 08시 36분 최종 작성, 2022년 2월 14일 열람
https://ko.wikipedia.org/wiki/용흥궁
(03) ‘용흥궁(龍興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년 2월 14일 열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9765
(04) ‘철종의 잠저, 강화 용흥궁’ 지역N문화 생활문화, 삶과 지혜가 녹아 있는 한국의 가옥
2022년 2월 14일 열람
https://ncms.nculture.org/house/story/4755?jsi=
(05) 철종의 소박한 잠저, 강화 용흥궁 누마루
2022년 2월 14일 열람
2022 제20대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 현장 :: 사전투표율 (0) | 2022.03.05 |
---|---|
강화 고인돌, 강화 부근리 지석묘에 대해 알아볼까? (0) | 2022.03.03 |
연수구 함박마을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 (0) | 2022.02.14 |
#EV6, 초보운전자가 리뷰하는 전기차는 어떨까? (0) | 2022.02.02 |
#진주중앙시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진주중앙유등시장. (0) | 2022.02.02 |